진도여행 추천 삼별초군 최후의 저항 남도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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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전라도

진도여행 추천 삼별초군 최후의 저항 남도산성

by 칠칠신사 2022. 2. 19.

진도여행 추천 삼별초군 최후의 저항 남도산성

 

 

진도는 유배와 저항의 역사를 가진 곳이다. 고려 삼별초군이 여몽연합군과 맞서 끝까지 저항했던 곳이다. 진도여행에 필수적으로 보이는 곳들이기도 하다. 아직도 곳곳에 삼별초의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여몽연합군과 최후의 전투를 벌인 남도진성을 찾아가보자.

 

유 적 명 진도 남도진성(南桃鎭城)
종 목 사적 제127호
소 재 지 전남 진도군 임회면 남동리 149번지
규 모 둘레 564m, 복원 된 높이 3.6m, 동문 폭 2.5m, 서문 폭 2.3m
시 대 성종 22년(1491년)∼연산군 5년(1498년) 사이에 축조

 

고려 원종 때 배중손(裵仲孫)이 삼별초를 이끌고 진도로 남하하여 대몽항쟁의 근거지로 삼으면서 쌓은 성이라고 전한다. 남도진성(사적 제127호)은 고려 원종(재위 1259∼1274), 삼별초가 진도에서 몽골과 항쟁을 벌일 때 해안지방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성으로, 삼별초가 제주도로 옮겨갈 때 이곳에서 출발했다고 전해진다.

 

진도군에는 백제시대에 이미 3개 고을이 있었는데, 그 중에 진도군에 속한 것이 도산현(徒山縣)과 매구리현(買九里縣)으로, 매구리현의 중심이 구도포(九桃浦)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이러한 고을들이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시대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면, 삼국시대에 이미 축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13세기 초부터 창궐하기 시작한 왜구가 연해지방을 노략질하므로 1350년(충정왕 2)에는 진도의 관부(官府)와 백성들이 세종 초까지 내륙지방으로 피하여 살다가 귀향하였다. 남도포(南桃浦)에 만호부(萬戶府)가 처음 생긴 것은 1438년(세종 20) 정월의 일로, 이로 미루어 보면 현존하는 성은 그 뒤에 쌓은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남도포성은 동쪽에 있는 금갑보(金甲堡)와 더불어 명양(鳴洋)으로 돌아가는 바닷길의 요새에 위치하는데, 이곳은 남해안에서 서해안으로 북상하는 위치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1555년(명종 10) 5월 서해안으로 북상하던 왜적들에게 남도포와 금갑보가 분탕질당한 경우도 있고, 또 이곳의 만호들이 그들을 격퇴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지리적 특수성으로 말미암아 1683년(숙종 9) 6월에는 육군의 진관체제(鎭管體制)와 같은 수군진관(水軍鎭管)을 현재 전라남도의 위도(蝟島)와 가리포(加里浦)에 두었는데, 남도진(南桃鎭)은 가리포진관에 딸린 수군의 근거지가 되기도 하였다. 남도포진성은 평탄한 대지위에 축조한 평지형으로서 성곽의 형태는 동벽의 길이가 서벽에 비해 약간 짧은 사다리꼴(梯形)로 내탁법으로 쌓았다.

 

남도포진은 진도군이 해남군에서 분리되면서 진도고읍성에 터전을 정한지 6개월이 지난 1438년(세종 20)에 처음 설치된 후 1500∼1501년경에 진성을 축조하였다. 남도포진의 설치 배경은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지역이면서 물산이 풍부한 곳으로 군사적 요충이자 해로의 요충지로 지리, 경제, 군사적인 조건 때문이다.

 

 

남도포진은 1438년(세종 28) 정월에 설치되어 처음에는 전라수영에 속하였다가, 1479년(성종 10) 정월에 좌· 우수영으로 분리 개편된 후에는 전라도우수영 임치진관(臨淄鎭管)에 속하였다.

 

그런데 조선 후기의 지리지에는 본래 남도포진이 현재의 위치가 아니라고 밝히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동국여지지』에서는 진도읍성의 서쪽 47리에 있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 반면에, 『여지도서』이후의 지리지에서는 한결같이 40리로 기록하고 있어 7리의 차이를 보인다. 그리고 『대동지지』에는 구체적으로 현재의 위치보다 남쪽으로 7리 지점에 남도포진의 옛 진이 있었던 것으로 밝히고 있다. 이 기록대로라면 남도포진은 현재의 위치보다 남쪽으로 7리 떨어진 곳에 있다가 어느 시기엔가 현재의 위치로 옮겨온 것이 된다. 최종적으로 남도포진성은 1491년(성종 22)에서 1498년(연산군 5)사이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남도포진은 처음에는 전라수영에 속하였으나 1479년(성종 10)정월에 전라우도첨절제사영인 임치진관에 속하게 되었고, 중종대에는 전라우수영 가리포진관으로 속하게 되었다. 1895년 갑오개혁 때 폐진되었다.

 

쌍운교 및 단운교(雙雲橋 및 單雲橋)

 

남도진성의 남문 밖을 흐르는 개울인 세운천을 건너는 2개의 무지개 다리이다. 단운교는 옆에서 볼 때 무지개 모양을 하고 있으며, 다리 위에는 흙을 돋우고 잔디를 심었다. 길이 4.5m, 너비 3.6m, 냇바닥에서 다리 중앙부위까지의 높이 2.7m로 작은 규모이다. 이 지방에 흔한 돌을 다듬지 않고 그대로 이용하였는데, 다리의 아치 윗부분에는 편마암질의 돌을 판석 형태로 사용하고 아랫부분에는 윗부분에 사용된 돌보다 약간 큰 강돌을 사용하였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아치 부분인데, 다듬지 않은 납작한 모양의 돌을 세로로 세워서 불규칙하게 아치형태로 돌려 쌓았다.

 

단운교에서 약 40m 가량 떨어진 쌍운교는 개울의 너비가 단운교보다 넓어 쌍무지개 형식으로 만든 점이 단운교와 다르다. 단운교와 마찬가지로 편마암질의 다듬지 않은 돌과 강돌로 쌓아 만들었다.

 

단운교가 세워진 시기는 1870년 이후로 생각되나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며, 쌍운교는 주민들에 의해 1930년 즈음에 세워졌다고 전한다. 이 두 다리는 비록 규모는 작으나 단아한 멋이 있고,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사용하여 투박하기는 하지만 오히려 서민적인 정취를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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