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여행 추천 금골산과 보물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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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전라도

진도여행 추천 금골산과 보물석탑

by 칠칠신사 2022. 2. 18.

진도여행 추천 금골산과 보물석탑

 

 

해남에서 진대대교를 건너면 바로 진도로 연결된다. 진도대교 건너자마자 만나는 곳이 군내면인데 이곳에 볼만한 곳들이 있다. 그 중에 금골산(金骨山, 195m)은 금골산은 군내면 둔전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개골산(皆骨山)이라는 다른 이름이 말해주듯 산 전체가 기암괴석으로 형성돼 ‘진도의 금강’이라고 불리는 명산으로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진 산에 세 개의 굴이 있고, 5층석탑과 산 중턱의 굴에 마애여래좌상이 음각되어 있으며 해언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최근에 복원되었다. 금골산과 5층 석탑을 찾아보자.

 

 

■진도 금골산 오층석탑

■보물 제529호

■전남 진도군 군내면 둔전리 356-2 (금성초교)

 

 

진도 금골산 오층석탑 (金骨山 五層石塔)은 높이 4.5m. 석탑은 단층 받침돌 위에 5층의 몸돌과 지붕돌을 올리고 반구형(半球形) 돌로 상륜부(相輪部)를 조성한 모습이다. 석탑이 있는 곳에는 해월사(海月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전하며, 지금의 위치가 원래의 자리로 추정된다.

 

바닥돌은 땅 속에 묻혀 있어 구조를 알 수 없다. 단층 받침돌은 4장의 널돌로 면석을 짜고, 각 면마다 모서리 기둥과 1개의 가운데 기둥을 새겼다. 받침돌의 덮개돌에는 밑면의 쇠시리인 부연(副椽)과 윗면의 굄이 모두 생략된 채 아무런 새김을 하지 않았다.

 

 

1층 몸돌은 높이가 매우 높지만, 그 위의 몸돌은 낮은 편이어서, 체감을 주었지만 기형적으로 보인다. 몸돌의 각 면에는 별다른 새김이 없이 모서리 기둥만을 조각하였다. 지붕돌은 몸돌에 비해 넓고 두꺼운 편이지만 각 층마다 그 모습은 약간씩 차이가 있다.

 

이러한 차이는 3층과 5층의 지붕돌에서 더욱 확연히 나타나는데, 받침이 1층·2층·4층은 5단인데 반해, 3층과 5층은 각각 4단과 3단이어서, 비규율성을 나타내면서 체감률에도 혼란을 보인다. 지붕돌 추녀 밑의 전각(轉角)은 가벼운 반전(反轉)을 보이고 있다. 다만 반전은 곡선이 아니고 추녀 아래 부분을 비스듬히 잘라서 절단면이 3각을 이루는 이형(異形)이다. 머리장식인 상륜부는 후대에 보충한 것으로 보이는 반구형 돌을 제외하고는 다른 석재가 없는 상태이다.

 

이 석탑은 백제계 석탑을 계승한 것으로, 1층 몸돌이 지나치게 길고 각 층의 지붕돌이 길고 넓어서 조형미를 갖추지 못한 듯 보인다. 곧 백제계 석탑으로는 가장 남쪽에 건립된 석탑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조성 시기는 돌을 다듬은 수법이나 각 부분의 양식으로 보아 고려 말기로 추정된다.

 

 

무오사화 때 유배 온 이주

 

이주(李冑, 1468∼1504)는 1488년(성종 19)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검열을 거쳐 정언(正言)을 지냈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문인으로 몰려 진도로 귀양을 갔다. 진도 금골산 해언사(海堰寺)에서 6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다가 1504년 갑자사화 때, 예전에 궁궐 내에 대간청을 설치할 것을 청한 일이 있다는 이유로 김굉필(金宏弼) 등과 함께 사형 당했다.

 

유집으로 후손들이 소장한 78수의 유시들을 한데 모아 1571년(선조 4) 친구 최이재(崔貳宰)·장옥산(張玉山)과 후학 하중환(河中煥) 등이 편집한 것을 뒤에 방후손들이 간행, 편찬한『망헌문집(望軒文集)』이 있다. 진도에 있는 동안 금골산 해언사에서 유배자의 심정을 피력한「금골산록(金骨山錄)」이 『동문선』에 전하고,『동국여지지』와 『진도읍지』에도 수록되어 있다.

 

연산군 4년(1498)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났다. 당시 서른한 살이던 이주는 김종직(金宗直)의 문도로 붕당을 맺어 국정을 비판하고 시사를 훼방했다는 혐의로 곤장을 백 대나 맞고 진도로 유배되었다. 이주는 철성 이씨(鐵城 李氏, 固城 李氏라고도 한다)로 고려 말 이래 명문가였다. 게다가 엘리트코스를 밟아나가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였다. 그러나 언관(言官)으로서 지나칠 정도로 강직한 발언을 서슴지 않았으니, 연산군이 “이주 등은 분명히 나를 용렬한 임금이라 여겨 나의 신하가 되려 하지 않는구나”라고 전교를 내릴 정도였다.

 

결국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예전에 연산군에게 올린 상소문에서 “성종(成宗)은 나의 임금”이라 하였는데, 여기에 연산군을 임금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 들어 있다는 죄목이 추가되었다. 이때 이주는 이종준(李宗準)의 은행정(銀杏亭)에서 바둑을 두고 있었는데, 그를 체포하러 사람들이 오는데도 태연자약하였다. 마치 이러한 일이 일어날 것을 예견한 것처럼. 이주는 80대의 장(杖)을 맞고 천애원지(天涯遠地) 진도(珍島)로 유배의 길을 떠나게 되었다.

 

진도로 떠나기 전, 이주는 벽에다 “임금에게는 충(忠)을 잃고 어버이이게는 효(孝)를 잃어 인륜을 저버렸으니 바닷가 도깨비에게 몸을 던지겠노라”는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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