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조 반가사유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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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문화재

석조 반가사유상

by 칠칠신사 2022. 2. 8.

석조 반가사유상

 

 

국립중앙박물관은 용산 이전 10주년 기념 특별전으로 "고대불교조각대전- 불상, 간다라에서 서라벌까지”를 2015년 9월 25일부터 2015년 11월 15일까지 기획전시실에서 개최했었다. 필자가 반가사유상에 반해서 전시가 있을 때마다 따라다녔고, 국립중앙박물관도 여러 차례 갔었다.

 

금동 미륵보살 반가사유상(金銅 彌勒菩薩 半跏思惟像, 국보 제83호)은 너무도 유명하다. 하지만 여기서는 금동으로 만든 것은 언급하지 않고 석조 반가상만을 얘기 한다. 다만 안타깝게도 애초 외부에 조성되었기로 많이 훼손되어 전체를 볼 수 없음을 참으로 아쉽게 생각한다.

 

당시 전시에 출품되는 작품은 총 210건으로, 전시의 주제와 범위는 한국에서 개최되는 전시라는 점을 감안하여 인도에서 불상이 처음 등장한 시기부터 우리나라에서 반가사유상 제작이 정점에 이른 700년경까지로 설정하였다. ‘불교조각’은 다양한 형식을 포함할 수 있지만, 이번 전시에서는 그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독립상 성격의 불상과 보살상을 위주로 했다. 이중에서 특히 석조 반가사유상에 대해서 알아본다.

 

 

봉화 북지리 석조반가상

보물 제997호

대구시 북구 대학로 80, 경북대학교박물관

 

경북 봉화 북지리 석조 반가사유상(奉化 北枝里 石造半跏像)이 경북대로 옮겨진 이후 50년 만에 첫 나들이를 나왔다. 이 반가사유상은 1965년 11월 당시 봉화 물야면 북지리에 남아 있던 마애여래좌상의 하반부를 발굴 조사하는 과정에서 발견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66년 1월 8일에 가까운 경북대학교로 옮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높이 160㎝가량의 이 본상은 현재 상반신은 깨어져 없어지고, 하반신과 하반신과는 별도로 조성된 것으로 보여 지는 원형(圓形)의 연화문(蓮華紋) 족좌(足座)만이 남아있지만, 우수한 조각기법으로 제작된 보기 드문 수작(秀作)이다. 상반신은 형식은 잘 알 수 없으나, 상의를 벗은 듯하며 하체에 표현된 법의(法衣)는 매우 얇아서 두 다리의 윤곽선이 그대로 드러난다.

 

왼쪽 무릎 위에 올려놓은 오른쪽 다리는 매우 크고 무릎을 높이 솟게 하여 강조하고 있다. 올려놓은 오른쪽 다리 밑에는 3단으로 형성된 옷주름이 유려하게 흐르고 있는데 그 선(線)들이 선명하게 도드라져 있어 생동감을 준다. 이들 옷주름 옆에는 커다란 사각형의 고리와 화려한 영락(瓔珞)이 늘어져 있다. 상의 뒷면에는 상의 옷주름만을 단순하게 표현하고 있어 전면(前面)을 위주로 조각하였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대좌(臺座)는 거의 원통형이며 둘레에는 작은 앙련단엽문(仰蓮單葉紋)이 돌려져 있다.

 

함께 발견된 족좌(足座)는 약 70㎝가량의 원반형으로 7개의 복련(伏蓮)이 새겨져 있다. 이 반가상은 양식적인 면에서 국보 제 83호 금동보살반가상과 비교되는 점을 지니고 있으며, 왼손의 위치, 오른쪽 무릎의 팽창, 예리하고 극히 사실적인 옷주름, 화려한 영락 등에서는 뛰어난 조각기법으로 이루어진 상(像)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반가상은 전체적으로 탄력 있고, 당당하며, 볼륨이 강조된 독특하고도 사실적인 표현수법을 보여주는 삼국시대 말∼통일신라시대 초기에 걸친 7세기 중엽경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서기 6, 7세기에 걸쳐 삼국에서 모두 유행하여 삼국미술의 뛰어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다. 고대의 조각사는 이 같은 반가상이 삼국에서 유행하였으므로 우리나라 불상 조각사의 첫머리를 장식하였다고 볼 수가 있다.

 

반가사유상이라는 명칭은 두 가지 특징에 기인한다. 첫째는 그 자세가 둥근 의자에 걸터앉아 발하나(오른쪽)를 올려서 다른 쪽 다리 무릎 위에 얹고 있다. 둘째는 오른손을 들어 손끝을 턱에 댐으로써 깊은 생각에 잠긴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첫째 특징을 '반가(半跏)'라하고 둘째는 '사유(思惟)'라 불러 반가사유양식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좀더 자세하게 부를 때에는 미륵보살 반가사유상(彌勒菩薩半跏思惟像)이라 하는데 보통 반가상, 반가사유상이라 한다.

 

물론 이러한 반가사유의 불상 형식은 우리나라에 앞서 인도와 중국에서 먼저 나타난다. 인도의 반가사유상은 태자상(太子像)으로 조성된 듯하다. 석가여래가 젊어서 왕궁을 빠져나와 속세로 들어가 수도하면서 깊은 사유에 잠겼던 당시의 모습이라고 한다. 다만 삼존 조각 가운데에는 좌우대칭으로 반가사유상을 조각한 예도 있다. 중국에서도 초기에는 태자상으로 조성된 듯하다. 그러나 점차 시대가 흐름에 따라 용수보살(龍樹菩薩)이라 불리게 되고 당시 유행하던 미륵신앙을 배경으로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한반도에서는 태자상으로 조성된 흔적은 아직 보이지 않으며, 삼국에서의 유품은 모두 미륵보살상으로 신앙을 받던 것이다. 그것도 오랜 기간 동안이 아니라 6세기와 7세기에 걸쳐 삼국의 통일전쟁기간을 거쳐 통일된 초기까지 유행하였다. 현존하는 반가사유상의 유례에서 보면 삼국 중에서도 신라에서 크게 유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예리하고 사실적인 옷주름

 

경북대에 전시된 목욕하기전 모습(2015.3.31)

 

국립중앙박물관 측이 이 불상을 전시에 내놓으려 했던 것도 그 존재조차 모르는 많은 사람에게 직접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 거대한 불상을 어떻게 안전하게 옮길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발굴된 지 50년 만에 첫 서울 나들이에 나선 불상을 어떻게 하면 대구에서 서울까지 안전하게 모셔올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돌이 워낙 오래돼 바스러질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일단 이불로 옷을 꽁꽁 입힌 다음 견인줄을 감아 화물차로 대구에서 서울까지 조심조심 운송했다.

 

박물관에 도착한 뒤엔 지게차로 들어 올려서 국립중앙박물관 석조물 센터 안으로 다시 옮겼다. 기왕 서울 온 김에 목욕도 해드리기로 했다. 이온수를 끓여서 증기로 분사하는 방식으로 1400년 묵은 때를 조심스럽게 벗겨냈다. 그다음은 기념촬영 순서입니다. 3차원 스캐너로 불상을 구석구석 촬영해 전후좌우 위아래 모든 각도에서 살펴볼 수 있도록 디지털 이미지로 만드는 과정이다.

 

이렇게 해서 목욕과 사진촬영이 끝나고 이제 전시장으로 갈 시간이 됐다. 전시 개막을 1주일 앞두고 전시장에 불상을 설치하는 작업이 진행됐는데, 이날 아침 8시 반에 시작된 운송 설치 작업이 오후 3시에야 끝났다. 같은 박물관 안에서 불과 몇 백 미터 거리를 옮기는 데만도 5시간이 넘게 걸린 것

발견 당시의 북지리 반가사유상

 

경주 송화산 출토 석조반가사유상

높 이 : 125㎝

 

 

경주 송화산 출토 석조반가사유상(慶州 松花山 出土 石造半跏思惟像)은 1909년 경주 서쪽의 송화산 기슭에 위치한 김유신의 재실(齋室) 금산재(金山齋)에서 발견되었다. 양팔과 머리 부분이 잘려 나가고 화강암의 석질도 연하여 구멍이 많고 마멸이 심한 편이다.

 

상체는 나형(裸形)이며 몸을 약간 앞으로 숙이고 허리는 가늘게 표현되었다. 오른쪽 무릎 위에 걸쳤던 오른쪽 팔꿈치 부위와 왼쪽 발목을 잡고 있는 왼손 일부가 남아 있어 반가사유의 자세를 이루었던 신체 구조를 엿볼 수 있다. 목에는 단순한 형태의 넓고 둥근 목걸이를 걸쳤다. 왼쪽 어깨 부분에는 보발(寶髮)의 일부가, 왼쪽 손목에는 팔찌의 흔적이 남아 있다. 허리에 돌린 군의(裙衣)의 띠는 두툼하게 조출하여 상체와 1단의 층을 이루었다. 오른발은 곧게 내린 왼쪽 무릎 위에 얹어 반가좌의 좌세(坐勢)를 이루었다. 반가한 오른쪽 무릎 밑에는 반가사유상에서만 볼 수 있는 군의 자락 받침이 삼각형으로 돌출되어 있다.

 

하체에 걸친 군의는 두꺼워 두 다리가 풍만해 보이며, 따라서 상 전체에 안정감을 더하고 있다. 옷주름은 모두 얕은 이중의 선각으로 간략화 되었다. 이러한 군의 자락은 대좌 전면과 좌우 측면을 감싸며 조용히 흘러내렸는데, 그 추상적 표현으로 인하여 평면적인 느낌을 들게 한다. 군의 자락에는 또한 장식성이 더해져 있다. 이 석상은 봉화반가사유상에 비하여 고식(古式)을 띠고 있고, 양식적으로 국보 제78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과 비교할 수 있다. 조성 시기는 7세기 초로 추정된다.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

 

앞면은 오른쪽 다리를 받치며 마무리된 부분과 대좌를 감싸 내린 부분으로 이중의 옷주름 자락이 표현되었다. 좌우 측면은 세로로 중첩되었다. 그리고 끝단이 Ω자형으로 마무리된 부분과 투박하면서도 긴 장식띠[結帶] 부분으로 질서 있게 정돈되었다. 좌우 측면의 장식띠 위아래에는 영락(瓔珞) 장식이 새겨져 있다. 왼발이 얹힌 족좌(足座)는 볼륨이 강한 단판복련좌(單瓣覆蓮座)이다. 대좌는 원통형으로 신체에 비하여 높고, 위로 갈수록 좁아져 허리 부분이 잘록하다. 그리고 아랫부분에 한 줄 음각선이 돌려진 외에는 장식이 없는 간단한 형식이다.

 

뒷면의 옷주름은 어깨 부분에서 간단한 선각을 좌우대칭적으로 표현하여 좌우 측면의 추상적인 옷주름과 대조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원각(圓刻)으로 된 대형의 석조반가사유상은 현존 예가 매우 드물다. 이밖에는 경상북도 봉화군 물야리에서 출토된 반가사유상(경북대학교 소장)이 있을 뿐이다.

 

인도에서 다른 불보살과 거의 같은 때에 발생한 반가사유상은 여래상의 협시보살이었다. 중국에서는 나무 아래에서 사유하는 모습의 태자사유상으로 나타났다가 독립된 상으로 바뀌어 우리나라에 전해졌다. 우리나라의 반가사유상은 삼국시대 6세기부터 약 100년 동안 집중적으로 조성되었는데, 대부분 독립된 보살상 형식으로 만들어졌다. 중국에는 높이 20~30cm의 흙이나 돌로 만든 예가 많은데 비해, 우리나라에는 1m에 가까운 대형의 반가사유상도 있으며 20~30cm의 소형 작품도 많이 전해지고 있다. 신라지역에서는 경주 단석산의 신선사 마애조상군 가운데에 반가사유상이 있으며, 봉화와 경주 송화산에서 머리와 상반신이 깨져 없어진 대형의 석조반가사유상이 출토되어 당시 신라에서 반가사유상의 제작이 성행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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