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진여행 비운의 천재학자를 모신 입한재
본문 바로가기
여행/충청도

당진여행 비운의 천재학자를 모신 입한재

by 칠칠신사 2022. 3. 17.

당진여행 비운의 천재학자를 모신 입한재

 

구봉 송익필이라고 하면 대부분 잘 알지를 못합니다. 그의 불확실한 정치적 행보를 제외하고 학문적 차원에서 보면 대단한 학자였음이 분명합니다. 이 곳을 찾아가는 도로명 주소 또한 그의 호를 따서 ‘구봉로’입니다. 그의 행적과 묘소를 찾아가보았습니다. 조선 선조 때 이율곡·성혼 등과 어깨를 나란히 했지만 신분 때문에 비운의 학자였던 그의 묘소와 재실를 찾아보았습니다.

 

당진 입한재(立寒齋)

당진시 향토유적 제5호

충남 당진시 구봉로 137-42

 

출입문에는‘ 龜峯先生齋閣’이란 편액이 걸려 있고, 정면 3칸 측면 2칸의 재실에는 ‘立限齋’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후손의 형편이 어려워 제사도 모시지 못하다가 영조 28년(1752) 충청감사 홍계희가 올린 상소로 사후 153년 만에 신분이 회복되고 벼슬을 받았다. 이후 송시열의 학통을 계승한 1720년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가 재실을 지을 것을 마음먹고 모금하여 입한재를 지었다고 한다.

구봉선생제각

 

1802년 당진현감을 지낸 민백준(閔百準)이 녹봉을 희사해 제실을 보수 하고, 1835년 4월 26일 당진현감 민익현(閔翊顯)이 제실을 중건했다. 후손 송계원이 문중의 도움을 받아 옮겨지었다.

 

 

묘소

 

묘소 역시 전체적인 너비에 비해서는 소박한 편이다. 원형 봉분에 한 쌍의 문인석이 서 있고, 상석과 향로석, 오래된 묘비와 근래에 세운 묘비가 있다. 이 비문은 철학박사 신의식이라는 분이 짓고 썼으며, 1993년 세워졌다.

 

『국역국조인물고』에는 우암 송시열이 쓴 묘갈문이 전해지고 있고, 이 글을 새겨 묘비를 세웠다고 한다. 이후 이 묘비가 멸실되어 1720년 김진옥이 새로 묘비문을 지었다고 하는데, 현재 구 묘비 뒷면에 이 글이 실려 있다. 전체적으로 소략하게 지은 것 같다.

 

송익필(宋翼弼, 1534∼1599)

 

할머니 감정(甘丁)이 안돈후(安敦厚)의 천첩 소생이었으므로 신분이 미천하였다. 그러나 아버지 송사련이 안처겸(安處謙)의 역모를 조작, 고발하여 공신에 책봉되고 당상관에 올라, 그의 형제들은 유복한 환경에서 교육받았다. 송익필은 재능이 비상하고 문장이 뛰어나 아우 송한필(宋翰弼)과 함께 일찍부터 문명을 떨쳤고, 명문 자제들과 폭넓게 교유하였다.

 

초시(初試)를 한번 본 외에는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에 몰두하여 명성이 높았다. 이이(李珥)·성혼(成渾)과 함께 성리학의 깊은 이치를 논변하였다. 특히 예학(禮學)에 밝아 김장생(金長生)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또 정치적 감각이 뛰어나 서인 세력의 막후실력자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586년(선조 19) 동인들의 충동으로 안씨 집안에서 송사를 일으켜, 안처겸의 역모가 조작임이 밝혀지고 송익필의 형제들을 포함한 감정의 후손들이 안씨 집의 노비로 환속되자 그들은 성명을 바꾸고 도피 생활에 들어갔다.

그러나 1589년 기축옥사로 정여립(鄭汝立)·이발(李潑) 등 동인들이 제거되자 그의 형제들도 신분이 회복되었다. 그 때문에 기축옥사의 막후 조종 인물로 지목되기도 하였다. 뒤에 또 노수신, 이산해 등 동인들을 비난한 조헌(趙憲)의 과격한 상소에 관련된 혐의로 이산해(李山海)의 미움을 받아 송한필과 함께 희천으로 유배되었다.1593년 사면을 받아 풀려났으나, 일정한 거처없이 친구·문인들의 집을 전전하며 불우하게 살다 죽었다. 1586년 안씨의 송사 전까지는 고양의 귀봉산 아래에서 크게 문호를 벌여놓고 후진들을 양성하였다.

 

그 문하에서 김장생·김집(金集)·정엽(鄭曄)·서성(徐渻)·정홍명(鄭弘溟)·강찬(姜澯)·김반(金槃)·허우(許雨) 등 많은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시와 문장에 모두 뛰어나 이산해·최경창(崔慶昌)·백광훈(白光勳)·최립(崔岦)·이순인(李純仁)·윤탁연(尹卓然)·하응림(河應臨) 등과 함께 선조 대의 팔문장가로 불렸다.

 

시는 이백(李白)을 표준으로 했고, 문장은 좌구명(左丘明)과 사마천(司馬遷)을 위주로 하였다. 자신의 학문과 재능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여 스스로 고대하게 행세하였다. 또한 아무리 고관·귀족이라도 한 번 친구로 사귀면 자(字)로 부르고 관으로 부르지 않았다. 이러한 태도가 송익필의 미천한 신분과 함께 조소의 대상이 되었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구봉집(龜峯集)』이 전한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구봉집(龜峰集)

 

조선시대 학자 송익필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1622년에 간행한 시문집이다. 송익필의 문인 심종직(沈宗直)이 1622년(광해군 14) 홍산군수(鴻山郡守)로 재직하고 있을 때 정엽(鄭曄)·신흠(申欽)의 서문과 김장생(金長生)의 발문을 실어 시집 1권을 간행하였다.

그 뒤 1642년(인조 20) 김상성(金相聖)이 잡저(雜著) 1권과 서(書) 1권을 합편하여 전집을 만들고, 「현승편(玄繩編)」·「예문답(禮問答)」·「가례주설(家禮註說)」과 부록, 송익필의 동생 송한필(宋翰弼)의 『운곡집(雲谷集)』을 함께 실어 간행하였다. 권말에 김상성의 간기(刊記)가 있다.서지사항목판본. 11권 5책. 규장각 도서에 있다.

 

시들은 모두가 솔직하고 담아하며 음미할수록 격과 여운이 있다. 특히, 성혼이 앓아누워 있을 때 보낸 서신을 성혼이 죽은 뒤에야 받고서 그리움과 슬픔을 못 이겨 노래한 「억우계(憶牛溪)」, 정철이 중국에 사신으로 가면서 나와 보지 않는다고 나무란 글을 받고 읊은 「송송강조천(送松江朝天)」, 조헌(趙憲)이 창의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 감회를 나타낸 「문조헌창의(聞趙憲倡義)」 등에서 이러한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송익필이 이이·성혼 등과 성리학을 비롯하여 경전·자사(子史) 등 학문전반에 걸쳐 주고받은 내용을 모두 수록하여 놓았다. 「예문답」은 이이(李珥)·성혼(成渾)·정철(鄭澈) 등과 일반적인 의례에 관해 묻고 답한 내용을 적은 것이며, 「가례주설」은 주희(朱熹)의 『가례』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한 조목도 빼놓지 않고 모두 주해를 붙인 것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발췌]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