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납동 토성은 한반도 최대의 토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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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수도권

풍납동 토성은 한반도 최대의 토성이다

by 칠칠신사 2022. 2. 10.

풍납동 토성은 한반도 최대의 토성이다

 

□ 풍남동 토성(風納洞 土城)

□ 종 목 : 사적 제11호

□ 소재지 : 서울 송파구 풍납1동 72-1번지

 

 

01. 개요

 

1900년대 정론적인 학계에서의 발견은 1925년 홍수 때로, 당시 풍납토성은 한강의 서벽이 유실됨으로써 발견, 조사되었다. 이후 1963년 성벽 둘레가 사적으로 지정되었고, 성의 내부는 사유지로 남아있다. 1964년 시굴조사에서 백제 건국초기의 철기시대 유물이 발굴되었다. 1997년 아파트 공사를 하던 중 유물이 발굴되어, 발굴 조사를 하였다.

 

당초 명칭은 광주풍납리토성(廣州風納里土城)이었으나, 2011년 7월 28일 지역명 병기 및 한글맞춤법(띄어쓰기)를 적용하여 서울 풍납동 토성(서울 風納洞 土城)으로 문화재 명칭이 변경되었다.

 

1925년 대홍수 때 청동제 초두(鐎斗,자루솥)가 2개 발견되었으며, 이후 토기 조각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1964년 10월 서울대학교 고고인류학과팀에 의하여 발굴되었다. 1996년 이후 발굴로 토기, 그물추, 물레, 가락바퀴, 기와 등이 출토되었다. 1999년 이후 한신대 박물관은 경당지구를 발굴하였는데, 제사유적과 제사 후 폐기된 도구와 음식을 버리는 구덩이 유구, 기와와 건물바닥에 까는 전, 토기, 유리구슬 조각, 제물로 보이는 말머리 등이 나왔다. 경당지구의 제사유적 주건물은 길이 13.5m, 폭 7, 길이 3m의 궁자형(宮자형, 또는 여呂자형이라고도 한다) 가옥이었다.

여자형건물지 복원도

올림픽대교와 천호대교 사이에 타원형으로 위치해 있으며, 전체 넓이는 35만 3589.1 ㎡이다. 본디 둘레가 4km에 달하는

큰 토성이었으나,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남서쪽 일부가 잘리고, 이후 서울이 개발되는 와중에도 특별한 보호 없이 방치되는 등 잡다한 사유들로 말미암아 현재는 3.5km가량만이 남아 있다.

 

  01.1 성의 규모와 성격​

 

풍납토성은 동벽 1.5km, 남벽 200m, 북벽 300m로 둘레 약 2.7km가 남아있으나 조사 결과 둘레가 4km가 넘고 부지 26만평 이상으로 한반도 내의 최대 규모 토성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탄소연대 측정에서 이 성은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후 3세기 사이에 축조된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성의 성격을 두고 대한민국 역사학계에선 한성백제 도성인 위례성으로 보는 견해와 방어성으로 보는 두 가지 의견이 존재해왔었다.

 

그러나 발굴이 진행되면서 규모, 성곽의 형태, 발굴 유물들로 인해 단순 방어용 토성으로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이런 성을 짓는데 에는 연인원 100만명 정도가 동원됐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도성의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02. 발굴 현황과 내용

 

최근 2017년 조사에서 성벽 흔적과 문이 있었던 자리가 확인되었다. 서벽이 유실되면서 중국제 초두(鐎斗)를 비롯한 백제 유물이 확인되어 풍납토성의 존재가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1997년 처음 풍납토성에 대한 긴급발굴이 이루어진 후로 약 20년이 지나는 동안 풍납토성은 전체의 절반도 발굴하지 못했다. 이미 성 내부에 주택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기 때문이다.

 

현재 절반도 채 발굴하지 못했지만 발굴조사보고서는 무려 18권까지 나왔다. 물론 소규모로 조금씩 발굴하다 보니 보고서의 권수가 많아질 수밖에 없는 점도 있지만 보고서 하나하나가 한성백제의 물질문화 연구에 있어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자료들이다. 즉, 한성백제를 이야기하면서 풍납토성을 빼고는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다. 발굴 내용을 모두 언급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풍납토성의 중심부에 해당하고 중요한 자료들이 많이 나온 경당지구 위주로 간단히 서술했다.

 

경당지구에서 확인된 대형 수혈(구덩이)로 다량의 토기편과 동물뼈가 확인되었다. 특히 소(1개)와 말(9개) 머리뼈가 10개체 이상 확인되었으며 대부(大夫)가 새겨진 직구단경호(곧은입항아리) 등이 확인되어 제사를 지낸 후 사용한 토기 및 희생된 동물을 폐기한 유구로 보인다. 대부(大夫)란 글자를 처음에는 어떤 직책으로 생각했으나 나중에 여러 유물을 비교한바 제의적(祭儀的) 성격이 강한 것으로 판단했는데 그것은 바로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해시태그 # 가 함께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의미하는 것인지는 더 많은 연구가 있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소와 말의 머리뼈가 확인되었다는 것인데, 몸통에 해당하는 부분이 확인되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제의적 활동이 있었음을 뒷받침해준다. 또한 소와 말은 운송수단이자 농경에 활용된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매우 높은데, 이런 동물을 죽였다는 것 자체가 제사의 가능성을 배제하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한성백제기에 소나 말을 이용한 우경 또는 마경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추측만 있을 뿐 뚜렷한 증거가 없다. 하지만 농경을 배제하더라도 운송수단이라는 점이 있기 때문에 소와 말의 중요성은 역시나 높다고 할 수 있다

 

  02.1 경당지구에서 확인된 대형 창고 터와 도기

 

경당지구에서 확인된 대형의 창고이다. 유구는 화재가 일어난 흔적이 남아 있는 것으로 미루어 화재로 인해 폐기된 것으로 추정된다. 내부에서는 다수의 백제 토기와 함께 중국에서 만든 시유도기(유약 바른 도기)가 확인되었으며 특히 시유도기 중에는 동전으로 무늬를 찍은 전문도기(동전무늬 도기)도 확인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시유도기 내부 흙을 조사한 결과 복어를 비롯한 어류의 뼈 및 이빨이 확인되었다는 것이다. 복어는 치명적인 독이 있어 함부로 먹을 수 없는 생선이다. 이런 복어를 백제인들이 즐겨먹었다는 것으로 미루어, 백제인들은 복어의 독을 제거하는 방법을 알았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사람들의 식생을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196호 유구에서 확인된 중국제 도기와 해산물의 뼈는 당시 풍납토성에 살았던 백제 왕도 사람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02.2 경당지구에서 확인된 우물

 

경당지구에서 확인된 우물이다. 이 우물의 내부에는 백제토기가 층층이 쌓여있었는데 이 우물이 단순히 물을 마시기 위한 우물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우물에서 확인된 토기들을 복원하여 확인한 결과 토기의 구연부(입술부분)를 일부러 깨트린 흔적(훼기, 毁棄)이 확인되었다. 이 역시 우물에서 모종의 의식을 치루고 토기의 입술부분을 일부러 깨트려 우물에 토기를 던진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03. 의의

 

풍납토성이 한국 고대사를 다시 썼다는 평가가 가능한 건 크게 두 가지 부분에서다.

 

  03.1. 위례성의 위치 비정

 

첫째로 풍납토성은 기존의 위례성 = 몽촌토성이라는 학설을 뒤집어 버렸다. 그 이전까지 풍납토성은 그리 중요한 성으로 취급받지 못했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풍납토성이 주목을 받았을 때 한 일본학자가 풍납토성을 위례성으로 비정했으나 묻혀버렸다.

 

이후 1960년대 서울대 고고학부의 조사에서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지만 그저 몽촌토성을 방위하는 사성(蛇城)일 것이라 추측했다. 이 학설은 이병도가 처음 주장한 것으로, 이후 한국 고대사학계에서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풍납토성은 한강과 너무 가까워 홍수 시 침수될 우려가 너무나도 컸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풍납토성이 한 번 쓸린 것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 더군다나 평지성이었기 때문에 방어면에서도 불리한 점이 많았다. 고구려 국내성이나 환도산성은 말할 것도 없고 신라의 경주 월성도 평지성이라기보다는 산성에 가까웠다. 정확히 말하면 월성은 평지성이다.

 

하지만 강으로 둘러싸인 남측은 전혀 접근이 안 되고, 북쪽은 야트막한 언덕이 급경사를 이루며 서있다. 따라서 평지성이긴 하되 산성이나 마찬가지다. 다시 말해 이래저래 따져 보아도 왕성으로서의 자격 요건이 참 애매했던 성이 바로 풍납토성이었다. 그렇게 한국 고대사학계에서는 풍납토성의 정체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왕성이라고 하긴 좀 애매한데, 규모는 너무 크니까.

바로 이 의문이 풀린 게 1997년이었다. 평소 풍납토성 = 하남 위례성설을 강력히 주장해오던 선문대의 이형구 교수가 토성 내에서 진행되던 아파트 재건축 공사장에 몰래 들어가 지표 조사를 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백제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단 한 번의 조사로 몽촌토성에서 나왔던 유물보다 많은 유물이 쏟아지자 정부는 서둘러 국립문화재연구소를 중심으로 긴급 조사에 들어가게 된다. 정부는 조금씩 풍납동 땅을 매입해서 건물들을 철거했고 그 결과 풍납토성이 왕성일 것으로 추측되는 수많은 부장품들이 발굴되었다.

 

또한, 토성의 건축 방법을 조사하기 위해 일부분을 절개하면서 풍납토성이 판축기법으로 세워짐이 밝혀졌다. 판축기법이란 황토, 모래 등 여러 종류의 흙을 정사각형의 판에 넣고 단단하게 다지면서 하나하나 쌓아올라가는 방법이다. 이는 흙의 물성을 이용한 상당히 과학적인 방법이며 풍납토성 정도의 성을 쌓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인력과 물자가 동원되어야 했다.

 

'토성' 이라는 이름의 어감 때문에 오해할 수 있는데, 그냥 애들 흙장난 수준으로 성벽을 쌓으면 높이 쌓지도 못하고 몇 개월 버티지도 못한다. 풍납토성이나 몽촌토성은 삼국시대 이후 약 1500년의 시간을 버텨냈다.

 

물론 세월이 흐르면서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아 성벽이 깎여나간 부분이 많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았음에도 오늘날까지 버티고 있다는 것이 대단한 것이다. 따라서 단순히 방위 목적으로 만드는 성에 이렇게 큰 노력을 기울일 리가 없으니 풍납토성이 하남 위례성이거나 적어도 왕성의 일부분이었다는 추측이 점차 정설화된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백제 개로왕 시절에 고구려 장수왕이 남진정책을 펼치자 이를 막고자 흙을 구워 성을 쌓았다고 한다. 원문에도 증토축성(蒸土築城)이라고 하여 찔 증(蒸) 자를 사용하고 있다. 이를 두고 학계에서도 해석이 분분했으며 현재는 석회석을 800도 이상의 온도에서 구운 후 물과 진흙, 모래 등을 섞어 마치 시멘트처럼 사용한 것이 아닐까 추정하고 있다.

 

중국을 비롯해 중앙아시아 쪽에서 이러한 방식으로 지은 성이 남아 있다. 토성 내부 조사 결과 탄화층이 약간 발견되었는데 아마도 장수왕이 남하할 당시 고구려군이 약탈한 흔적으로 추측된다. 또한 군데군데 돌출부를 세웠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치성도 있었다고 추측한다. 다만 치성이 있었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으므로 목재 따위를 이용한 임시 가설물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03.2. 초기 백제사 관련 논쟁과 그 오류

 

둘째로 풍납토성은 2000년대 초반 들어 백제 관련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재조명하게 만들었고 20세기 고대사 연구를 뿌리째 흔들어버렸다. 삼국사기에는 백제 온조왕이 나라를 세우자마자 마한을 멸망시키는 등 백제가 초기부터 한반도 중부 지역을 완전히 제패하고 강력한 권력을 구축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종래 고대사학계의 중론은 그럴 리 없다였다. 백제뿐 아니라 신라나 고구려에 대한 삼국사기 초기 기록들도 많은 부분에서 의심을 샀다. 예를 들면 마한이나 진한 여러 지역들을 백제와 신라가 1~2세기에 접수했다는데 중국 사서 삼국지에는 3세기에도 소국들이 남아있다고 쓰여있고, 실제 땅을 파 보면 백제/신라계 유물이 나오는 시기가 한참 뒤이거나, 기록된 삼국 초기 왕들의 수명도 평범한 인간의 수명이 아니다.

 

사실 삼국사기 초기 기록 보면 의심이 안 갈 수 없는 노릇이긴 하다. 그래서 기존 학설에서는 백제가 나라다운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것을 8대 고이왕부터인 것으로 설명해 왔으며 마한 멸망 역시 근초고왕 대라고 설명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마한의 최종 멸망을 동성왕 때로 보는 사람들도 많다. 영산강 유역에서 5세기 이후에도 등장하는 금동관 등의 왕족 부장품에 근원한 주장이다. 바로 이 학설을 풍납토성이 뒤집어 버린 것.

 

당시 절개조사 결과 풍납토성의 일부 구역은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후 3세기 사이에 축조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의심받는 백제 초기 시대와 정확히 일치한다. 그리고 풍납토성은 판축기법과 크기 등으로 유추해 봤을 때 연인원 138만에 가까운 상당한 인원을 동원하지 않고서는 만들 수 없는 토성이고, 원래는 현재 풍납토성보다 약 2~3배 정도 더 컸다고 추정한다.

 

매일 동원한 인원의 합계가 총 138만 명이라는 뜻이다. 단순하게 보면 1,380명이 1천 일 동안 휴일 교대 없이 공사에 동원되어야 한다. 다른 연인원의 사례를 들어보자면 수원 화성을 2년 9개월 동안 짓는 데 연인원 70만이 들었다고 한다. 성을 쌓는데 흙의 양을 지금으로 계산한다면 150만톤, 트럭 15만대 분량이라고 추정된다.

 

2011년 다시 시행한 조사에서 동성벽 조사 결과는 다시 한 번 반전을 불러왔다. 성벽 절개조사는 1999년에 동쪽 중앙부, 2011년에 동쪽 남부 총 2회를 했는데, 2014년 12월 3일 발표한 연구 결과, 성벽의 건축 연대가 부분별로 차이가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동쪽 중앙부는 기원전 1세기 준공, 기원후 2~3세기 증축이었는데, 동쪽 남부는 3∼4세기 준공, 4~5세기 증축이라고. 더 정확히는 동성벽의 건축 연대는 250∼320년으로 구 한성백제의 건립 연대인 3세기로 다시 올라가 버린 것. 아마도 성벽이 완비되어 국가적 도성의 역할을 한 시기와 최초로 작은 성이 지어진 시기가 다른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장정 수백∼수천 명을 수백 년간 여러 차례 꾸준히 동원할 수 있을 정도의 강력한 권력이 이 시기 한성 지방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 중부에 존재했던 것이고, 기록에 의하면 그것은 바로 백제일 가능성이 높다.

 

또한 삼국지에도 나오는 오나라 장수 주연(182∼249)의 무덤이 발굴됨과 함께 풍납토성에서 전문도기가 발굴되었는데 백제가 중국과 교류한 것이 4세기 말로 알려져 왔으나 3세기 초부터 교류한 것으로 보여진다. 다만, 고고학적으론 부장품의 연대로 성과 고분의 연대를 판단하지 않는다. 왜냐면 성과 고분은 먼저 만들어지고 부장품이 후에 묻혔을 가능성도 크기 때문이다.

또 유물 중에서는 소가야와 왜국의 도기도 출토되었다. 이로서 백제는 이때 이미 소가야와 왜국과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소가야가 있었던 산청지방 유적에서도 이미 백제의 도기가 출토된 바가 있어 이를 뒷받침한다. 또 백제가 중국과 왜를 이어주는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04. 위례성

 

『삼국사기』에 온조의 첫 도읍지 위례성은 ‘北帶漢水 東據高岳 南望沃澤 西阻大海(북대한수 동거고악 남망옥택 서조대해) 북쪽에 한수(漢水)가 있고, 동쪽에 높은 산(高岳)이 있으며, 남쪽에 기름진 들(沃澤)이, 서쪽은 대해(大海)로 막혀있다’고 했다.

 

현재로서는 가장 유력한 후보 중의 하나지만 그래도 한동안은 확정된 건 또 아니었다. 왜냐하면 풍납토성을 위례성으로 단정 짓는 직접 근거가 나타나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풍납토성의 규모나 축조에서 동원된 인원들, 또는 풍납토성에서 출토된 유물들의 규모로 풍납토성을 위례성으로 확정짓는 분위기가 강했지만 다 간접증거일 뿐이어서 확실하게 풍납토성이 무슨 역할을 했는지는 고고학적 증거가 나오지 않은 상태였다.

 

2006년 풍납토성의 중심부를 가로지르는 도로가 발견되면서 풍납토성=위례성이 거의 정설로 굳어져가는 분위기이다. 당시에는 왕성에만 성 내부를 십자형으로 가로 지르는 도로를 만들었으며, 그때 규정되는 도로의 폭과 풍납토성에서 발견된 도로의 폭이 거의 비슷하다. 기록상으로도 가장 유력한 위례성 후보다. 현재까지 남은 여러 후보지들 중 삼국사기의 "넓고 평평한 땅"이라는 기록에 가장 부합되기 때문이다.

 

현재는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모두를 통틀어 위례성으로 지칭하고 풍납토성을 북성(평지성), 몽촌토성을 남성(산성)으로 삼아 평소에는 풍납토성에서 지내다가 급박한 위기 시에는 몽촌토성으로 피했던 것 아닌가하는 의견이 가장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같은 삼국시대의 고구려 평양성 - 대성산성이나 신라 경주 월성 - 명활산성도 이런 방어구조를 택했으며, 후대의 후백제 평지 견훤왕궁 - 동고산성, 남고산성이나 조선의 한성 - 남한산성 역시도 이런 평시성 대피성의 이원적인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도 고구려 장수왕의 칩입 때 북성이 먼저 무너지고 뒤이어 남성이 무너졌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 권 제25 백제본기 제3 개로왕 21(475) 가을 9, 이때 대로 제우, 재증걸루, 고이만년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북쪽 성을 공격한 지 7일 만에 함락시키고, 남쪽 성으로 옮겨 공격하자 성 안이 위험에 빠지고 왕은 도망하여 나갔다.

 

풍납토성 일대는 한강변으로 수해에 노출된 지역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한강을 통한 수운에 매우 유리한 지역이기도 하니 백제의 고대국가화에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다. 또한 한강 밀물의 영향이 미치는 종착점인 송파 바로 북쪽에 위치해 한강 수운은 원활하게 이용하면서 농업용수도 풍족하게 확보할 수 있는 매우 절묘한 위치였다. 비류백제가 물이 짜서 주민들이 도망치는 바람에 백제에 흡수되었다는 기록과도 맥이 통한다.

 

05. 복원 사업과 갈등​

 

송파구청과 서울특별시청은 이 곳의 복원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이 지역의 땅을 확보하여 공원화 하고 있다. 문화재청과 사업자와 거주 주민들 사이에 보상비 갈등이 존재한다. 2000년 5월 13일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는 주민들이 굴삭기로 발굴 현장을 훼손하는 사건이 일어났었다. 삼표 풍납레미콘공장 부지의 이전 협상도 진행되었지만 결국 소송으로 번졌다. 대법원이 이전하라는 판단을 했고 이 부지는 송파구로 넘어갔다.

 

최근 2022년 2월 4일 문화재청은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사적) 내 삼표산업 풍납공장 일부 반환부지(6076㎡)에 대한 시굴조사에서 풍납토성 서성벽의 흔적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현재 닷새간의 기초조사만 이뤄져 앞으로 정밀조사를 할 경우 유구의 세부구조와 풍납토성의 규모 등이 더욱 자세히 밝혀질 것으로 기대된다. 문화재청은 이 부지 내 성벽의 잔존여부 확인을 위해 최근 5일간 시굴조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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