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가는 길
원천서당의 소재를 지도상에서 보고 안동댐 그리고 수몰지역에서 이건한 것으로 알고 갔는데, 찾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가는 길에서 이 지역 일대에 세계유교컨벤션센터와 한국문화테마파크 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봉화로 또 가야 하기에 시간이 부족해서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다음 기회에 여유롭게 한번 찾아보려고 한다.
월천서당(月川書堂)
월천서당은 월천(月川) 조목(趙穆, 1524∼1606) 선생이 중종(中宗) 34년(1539)에 건립하여 후진(後進)을 양성하고 수학(修學)하던 곳이다. 지금 전하는 월천서당은 월천이 81세에 자신의 정사를 지어 이름 붙인 ‘부용정사(芙蓉精舍)’라는 견해도 있다. 그는 여기서 사실상 일생을 보냈다. 마을 이름이 다래 즉 월천이다.
현판(懸板)은 스스인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이 썼다. 퇴계는 건물 오른쪽에 걸려 있는 ‘月川書堂’(월천서당) 대자(大字) 편액을 직접 썼다. ‘월’과 ‘천’ 글자가 가지런하지 않아 오히려 오래 기억되는 편액이다. 서당 마루 위에는 묵재 이문건이 쓴 ‘是齋’(시재) 큰 글자 편액도 걸려 있다. ‘시재’에는 날마다 바르게 사는 집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목조단층 와가로 중앙에는 2칸의 마루를 두고 좌.우에 통간방(通間房)을 배치한 홑처마집이다. 1590년에 개수되었다고 하는데 현재의 건물은 훨씬 후대의 것으로 보인다. 기둥은 방주이며 흘림을 두고 그에 따라 벽선이 그렝이가 되었다. 어간 대청 전면의 문 얼굴에는 당판문이 달렸는데, 중반과 하반에 널빤지를 끼우고 윗부분엔 넉살무늬를 구성하였다. 이는 쉽게 볼 수 없는 고형에 속한다. 대청의 좌측 방 북벽에 감실(龕室)이 고미다락처럼 구성되어 신위(神位)를 봉안하도록 하였는데, 이는 가난한 선비의 가묘 형태이다.
신도비(神道碑)
가선대부공조참판겸지의부사 월천조선생신도비
450년 은행나무
월천서당 앞에는 450년이 넘은 높이 20m 둘레 4.5m의 은행나무가 있는데 가을을 잔뜻품고 떨어진 잎들이 짙은 그리움이 되었다.
팔우정(八友亭)
월천서당 우측 뒤쪽으로 독립된 정면 3칸의 신축 건물이 보이는데 현판을 팔우정(八友亭)이라고 되어 있다. 팔우정에 대한 설명은 보이지 않는다. 8명의 벗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이런 건 늘 아쉽다. 설명이 없어서 그렇다. 경주 황오동에도 팔우정(八友亭)이 있는데 여덟 명의 벗이 모여 노닐던 정자가 아니라 여덟 형제가 우애(友愛)를 돈독히 하며 살았던 유서 깊은 정자라 알려져 있다.
겸재정(謙齋亭)
조목의 셋째 동생 겸재 조정((趙禎, 1551~1633)을 기리기 위한 정자로 건축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묘소
월천의 묘소는 서당 오른쪽 겸재정 뒤 산허리에 위치해 있다. 정온이 쓴 신도비는 묘 앞에 세워져 있었다. 종택을 복원하면서 신도비도 묘소 아래에 별도로 세울 계획이란다. 정온은 월천을 이렇게 기렸다. “선생의 아름다운 자질은 퇴계를 만나 이루어졌고, 퇴계의 도학(道學)은 선생을 만나 빛이 났다.”
복원중인 종택
일대는 500년을 세거한 횡성 조 씨 집성촌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70년대 안동댐이 들어서면서 수몰로 떠나기 시작해 40여 호 조씨 일가는 이제 겨우 한두 집이 남았다.
종가는 화재를 입은 뒤 당시 임시로 재실을 짓고 몇 년을 더 살았다. 그러나 종택을 복원할 형편이 아닌 데다 집안에 좋지 않은 일이 이어져 고향을 떠났다. 이후 정부가 유교 등 3대 문화권사업을 추진하면서 다래마을이 포함된다. 일대 문중 땅이 헐값에 수용되자 종손은 불에 탄 종택만큼은 복원해 달라고 안동시에 요청했다. 그게 다행히 받아들여져 이제 공사가 시작된 것이 ‘월천 유적 정비사업’이다. 다래마을은 반경이 4㎞에 달했다고 한다.
월천(月川) 조목(趙穆, 1524∼1606)
조목 선생은 퇴계 선생의 제자로 명종(明宗) 7년(1552)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여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갔고, 여러 관직을 거쳐 공조참판(工曹參判)에 이르렀다. 선생은 진작부터 벼슬에 뜻이 없어 45차례에 걸쳐 배명(拜命)이 내렸으나 대부분은 나가지 않아 40여 년동안 실제 봉직한 기간은 4년 남짓할 정도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義兵)을 모집, 동생과 두 아들로 더불어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공과 합세(合勢)하여 국난극복(國難克服)을 앞장섰던 분이다. 퇴계 선생의 제자 가운데 광해군(光海君) 7년(1615) 유일하게 도산서원(陶山書院) 상덕사(尙德祠)에 종향(從享)되었다. 당대 유림이 높이 평가했음을 뜻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다른 제자 다섯 명과 달리 주향으로 모셔지는 서원이 없다. 더욱이 사후 나라가 내리는 영예인 시호도 받은 게 없다. 전하는 문집이나 유적 등도 드물다. 무슨 까닭일까. |
월천은 어떻게 퇴계의 수제자가 됐을까
‘퇴계 문하 6 철(哲)’이라고 있다. 월천 조목과 학봉 김성일, 간재 이덕홍, 서애 류성룡, 한강 정구, 지산 조호익이다. 그가 선생을 뵌 과정을 먼저 따라가 보자. 연보에는 “(1538년 월천이) 겨울에 비로소 퇴계 이 선생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다”라고 정리돼 있다. 그의 나이 15세 때다. 월천리는 도산서당까지 낙동강변을 따라 30분이면 걸어갈 수 있을 정도로 가깝다. 퇴계는 친구 이문량에게 월천을 처음 본 뒤 “기지(耆之, 월천 아버지 조대춘의 字)가 아들을 잘 두었다”라고 칭찬했다. 이때부터 월천은 읽지 않은 책이 없었고 행동은 예법을 따랐다.
월천은 23세에 어머니상을 당한다. 그는 상주로서 무덤 아래 움막에 거처하며 예서를 보다가 의문이 나면 그 길로 퇴계를 찾아갔다. 26세엔 풍기로 간다. 풍기군수 퇴계를 찾아뵙고 백운동서원에서 지냈다. 퇴계가 풍기군수에서 물러나자 월천은 고향에서 제자를 가르치며 선생을 뵈었다.
1570년 11월 퇴계가 병으로 눕자 월천은 곁에서 약 시중을 들었다. 다음 달 퇴계는 세상을 떠난다. 월천은 스승을 잃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는 슬픔 속에서 장례를 주선해 이듬해 2월 선생을 건지산에 안장했다. 그는 스승을 애도하며 1년 동안 베띠를 둘렀고 3년상을 치르는 동안 안방에 들어가지 않았다.
1572년 4월 월천은 동문들과 모여 도산서당 위에 퇴계의 위패를 모실 상덕사를 세울 것을 논의했다. 이어 5월에는 퇴계의 일생과 학덕을 상세히 기술한 ‘퇴계선생언행총록’을 짓고 동문들과 논의해 ‘퇴계연보’의 초고를 만든다.
1576년에는 그가 건립을 주도한 도산서원이 완성돼 봉안제문을 지었다. 또 그는 1584년 ‘퇴계선생문집’ 편집을 시작해 1600년 간행 임무를 완수한다. 다른 대표 제자들은 어땠을까. 학봉과 서애는 모두 서울에서 벼슬살이를 하느라 스승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또 초기 스승의 문집을 꾸미는 데도 참여하지 않았다. 퇴계의 제자는 거주지에 따라 도산서당 인근 예안과 거리가 먼 안동으로 구분된다. 월천을 비롯해 이덕홍·김부륜·금난수 등은 예안 출신이며 김성일·류운룡·류성룡 등은 안동에 살았다. 안동 제자들이 연배도 아래였다.
조목은 퇴계 선생 사후 학문과 사상을 전하는 서원 건립과 문집 간행을 주도했다. [월천집]에 두 가지 관련 글이 남아 있다. 1576년(선조 9) 월천은 도산서원을 완공하고 상덕사에 선생의 위패를 모신다. 도산서원을 건립하고 24년이 지나 1600년(선조 33) 월천은 ‘퇴계선생문집’의 완성을 다시 고한다(退溪先生文集告成文). 문집을 간행하는 뜻과 과정 등이 담겨 있다. 제자로서 필생의 임무를 마친 것이다.
【참고 : 송우영의 고전 산책외 종합 및 일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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