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 청간정(淸澗亭)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2호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청간리 89-2
동해안은 지형적 특성을 말하듯 관동팔경(關東八景)을 비롯한 아름다운 명소가 많은데 일반적으로 관동8경이라 함은 대관령의 동쪽, 즉 강원도를 중심으로 한 동해안 8개소의 명승지로 북쪽부터 북한 통천의 총석정, 북한 고성의 삼일포, 고성의 청간정, 양양 낙산사, 강릉 경포대, 삼척 죽서루, 울진 망양정, 평해 월송정 등을 말한다. 여기서 "關東이라고 하는 것은 대관령(大關嶺)의 동쪽" 에 있다는 뜻이다.
속초 시내에서 7번 국도를 따라 북쪽으로 가면 오른쪽 편으로 영랑호가 보인다. 천진리를 지나 청간교를 지나면 오른쪽 편에 청간정 이정표가 눈에 들어온다.
01. ‘청간정’이라는 이름
남한에서 가장 북쪽에 있는 관동팔경은 청간정이다. 같은 관동팔경 정자인 월송정(越松亭) 주변으로는 이름 그대로 소나무가 가득하고, 망양정(望洋亭)에서는 말 그대로 바다의 파도를 바라보는 게 일품이다. 청간(淸澗)을 직역하면 ‘맑은 산골 물’이라는 뜻인데, 정자 주변은 지금은 바다만 보이지 산골물은 보이지 않는다.
02. 청간정의 역사
청간정이 언제 건립되었는지는 다른 관동팔경과 달리 역사 사료가 적어서 정확히 알 수 없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청간이 누정보다는 오히려 공무를 수행하는 자에게 마필과 숙식을 제공했던 역원(驛院)으로 기록되어 있다.
오히려 이 두 문헌에는 청간역 동쪽에 있는 만경루(萬景樓)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청간역(淸澗驛) 동쪽 수리(數里)에 있다. 돌로 된 봉우리가 우뚝 일어서고 층층이 쌓여 대(臺) 같은데, 높이가 수십 길은 되며 위에 구부러진 늙은 소나무 몇 그루가 있다. 대의 동쪽에 작은 다락을 지었으며 대 아래는 모두 어지러운 돌인데, 뾰족뾰족 바닷가에 꽂혔다. 물이 맑아 밑까지 보이는데 바람이 불면 놀란 물결이 어지럽게 돌 위를 쳐서 눈인 양 날아 사면으로 흩어지니 참으로 기이한 광경이다.”
그리고 사대부들이 만경루에 대해 시를 읊은 내용도 이 내용 뒤에 언급되고 있다. 즉 청간정이 세워지기 전에는 만경루가 간성의 으뜸이었나 보다. 그러다가 조선 중종 14년(1519)에 간성 군수 최청(崔淸)이 청간역 옆에 청간정을 중수했다 혹은 이건했다는 기록이 있다.
기념관 전시물중에는 중수했다는 기록에 따라 고려 시대 이전에도 존재했을 것이라고 추측하지만, 정식 명칭으로 청간정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최청이 건립한 이후라는 견해에 더 무게를 실리고 있다. 이유는 '청간정'이라는 공식명칭으로 나온 시들이 최청이 건립하기 이전에는 없기 때문이다.
이후 현종 3년(1662)에 최태계(崔泰繼)가 중수하였으며, 거의 같은 시기에 당시 좌상 송시열(宋時烈)이 금강산에 머물다가 이곳에 들려 친필로 '청간정(淸澗亭)'이란 현판을 걸었다. 고종 21년(1884)화재로 전소된 채 방치되었다가 1928년 토성면장 김용집(金鎔集) 등의 발의로 현재의 정자를 재건하였다.
그 후 1953년 5월 15일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정자를 보수하였으며, 현판도 이대통령의 친필로 개판하여 현재에 전하고 있다. 1980년 8월 1일 최규하 대통령이 동해안 순시 중 풍우로 훼손되고 퇴색한 정자를 보수토록 지시함에 따라 같은 해 10월 1일에 착공하여 다음 해 4월 22일에 준공을 보았다. 당시 공사비는 1억3천만원으로 정자를 완전히 해체하여 새로 건립하였으며, 아울러 휴게소 1동과 주차장 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청간정은 2011년 상부구조물이 기울어지고 들보에 균열이 생긴 것을 확인해 사업비 4억 원을 투입, 2011년 9월부터 복원사업을 추진해 2012년 6월23일 완공했다
03. 청간정은 단순 정자가 아니었다
청간정은 단순한 정자가 아니었다. 이곳은 다른 관동팔경 누정과는 달리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간성군 역원(驛院)인 청간역(淸澗驛)이라는 특이한 명칭으로 나온다. 역원은 옛날에 공무를 수행하는 관리에게 숙식과 마필(馬匹)을 제공하는 시설이다. 최청 시절의 청간정은 기존의 만경루(萬景樓)를 중수하고 해당 정자를 읍정(邑亭)으로 활용한 것이다. 하지만 이후 옛 기록들을 보면 청간정은 역로 옆에 있던 정식 객관으로 소개하고 있다.
윤선거(尹宣擧, 1610∼1669)의 문집 『파동기행(播東紀行)』에는 영랑호와 광호를 지나 저녁에 청간역정에 유숙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청간역정에 유숙하고 다음날 만경루에 올랐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여기서 나온 ‘청간역정’은 정철의 손자 정양(鄭瀁)이 1665년 만경루 옆에 설립한 것이다. 그것도 누마루와 온돌방을 같이 갖춰서. 즉 만경루(최청 시절 청간정) 옆에 설립한 청간역정이 이전 것을 대체한 것이다. 조선 후기 대다수 그림도 청간역정과 만경루 그리고 바위인 만경대를 잘 표현하고 있다.
04. 청간정은 본래 위치가 아니다
오늘날의 청간정은 옛 위치와 일치하지 않는다. 옛 사진을 보면 1884년 불탄 이후 청간정은 누각 돌기둥만 살아남아 있었다. 바람이 심한 바다 근처에 있던 환경이어서 그랬는지 불탄 잔해들은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다가 1928년 중수될 때 안전상 해안이 아닌 오늘날 언덕 정상 부근으로 돌기둥을 이전하여 정자를 지은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사료 고증을 제대로 거치지 않고 정자를 잘못 재건한 것으로 이후 객관으로 다시 복구되지 못한 채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옛 청간정이 있던 곳은 오늘날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어 일반인들이 접근하기 힘들다. 고성군 측에서도 이곳에 청간정 원형복원과 만경대 개방을 1989년부터 추진했다. 하지만 군 시설을 이전하는데 무려 300억 원 규모의 예산이 필요하다고 한다.
05. 청간정 구조
전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이며 초석은 민흘림이 있는 8각 석주로써 전후면 8개의 높이는 220Cm가 되어 마루 귀틀을 받치는 1층 기둥으로 되어있고, 중앙부의 높이 1.2m 초석 위에 팔각형의 동자기둥을 세워 누마루형식의 아래층 구조체를 형성하고 있다.
2층은 8개의 기둥이 모두 원주이며 기둥중심에서 외측으로 60Cm 정도 띄어 사면을 모두 단층 궁판을 평난간으로 둘렀다. 바닥은 우물마루이며 지붕측면 첫째와 둘째 기둥 사이에 정자 위로 올라오는 목조계단을 설치하고 있다.
정자 주위에는 잔잔한 대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고, 특히 우거진 노송과 망망대해, 그리고 신평들의 어우러짐은 분명 관동제일경이 틀림없다.
06. 옛 청간정 그림들
원래는 만경대 바위 옆 만경루와 함께 있던 객관이었다.
①김홍도가 그린 청간정
설악산에서 흘러나오는 청간천과 바다가 만나는 지점에 자연적으로 우뚝 솟은 봉우리가 만경대이고 그 오른편 아래 바위에 가려 반쯤 보이는 정자와 누각이 청간정과 만경루다.
화면 오른편 아래 귀퉁이에는 오가는 사람들로 붐볐을 청간역이 커다랗게 그려져 있다. 화면 중앙 아래로 층층이 우뚝 솟은 암봉과 용트림하는 소나무가 있는 만경대 아래를 의관을 갖춘 관리 혹은 신랑 일행이 지나고 있다. 짐꾼 등 총 7명의 행렬은 일산(日傘)을 펼쳐 든 기수를 앞세우고 떠들썩하게 지나고 있다.
정조대왕의 어명을 받고 50여 일 간의 강원도 여행을 온 김홍도와 김응환 두 명의 화원은 만경대에 올라 이 풍경을 그렸고, 나중에 여행을 마치고 정조대왕에게 보고했던 수십 폭의 그림 중 이렇게 구체적인 풍속이 그려진 것은 이 그림이 유일하다고 한다.
②강세황의 그림
③겸재 정선의 그림
07. 청간정의 현판
언덕 계단을 따라 청간정에 오르면 한자로 청간정이라고 쓰인 두 현판이 눈에 띈다. 하나는 바로 정면에 있고, 다른 하나는 건물 안 중간 부분에 보인다.
바깥쪽 정면에 있는 현판은 독립운동가 청파(靑坡) 전형윤(全亨胤) 선생이 쓴 것이다. 청파 선생은 젊은 시절에는 만주로 건너가 김좌진 선생 아래서 독립군 전투에 참여했던 이력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현판 글씨가 선생의 일생대로 기개 있게 보인다. 그런데 청파선생의 이름이 전형윤(全亨胤)으로 된 자료가 더 많이 인터넷상에 돌아다니니 유의해야 한다.
청파 선생의 현판 이전에는 우암 송시열 선생이 썼던 현판이 있었다고 했는데, 1730년 9월 강원감사로 부임한 이진순이 철거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유는 송시열의 노론과 대립했던 소론에 속했기 때문이다. 다만 들어갈 수 없는 만경대 바위에 '淸澗亭'이라고 새겨져 있는데, 훼손된 우암의 필적을 전하기 위해 그랬다고 한다.
건물 안 청간정의 현판은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친필이다. 이승만 정권의 지시로 정자를 보수했기에 그의 흔적이 남은 것이다. 청파 선생은 이후 본업을 유지하여 고건축물의 편액과 묵 글씨를 남기며 서예가의 명성을 유지했다.
누각 뒤쪽으로 가면 검은색으로 된 현판이 하나 보이는데, 한자로 된 시에 아래 ‘경신성하 심청간정 대통령 최규하’라는 문구가 들어온다. 해석하면 ‘1980년 여름 청간정을 찾은 대통령 최규하’라는 의미인데, 짧은 재위 기간 중에 청간정 유지, 보수를 지원한 대통령이어서 한시 현판이 있다. 시를 해석하면,
嶽海相調古樓上(악해상조고루상)
果是關東秀逸景(과시관동수일경)
설악산과 동해바다가 상조하는 옛 누각에 오르니,
과연 이곳이 관동에서 가장 빼어난 경치로구나.
청간정중수기(淸澗亭重修記)
이 중수기는 '단기 4286년 5월 10일 청파(靑坡) 전형윤(全亨胤) 병서(幷書)
사라진 이승만 대통령 칠언율시 시판
이 대통령은 1953년 청간정을 직접 방문할 당시 글을 남겼다. 칠언율시 형태의 글은 당시 이 대통령을 수행했던 지역부대장인 전형윤(全亨胤)이 받아서 시판으로 제작해 청간정에 걸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전형윤은 청산리 전투에 참여한 독립운동가로서 이 지역 부대에 근무 중이었는데 서예에도 능해 ‘서도대의(書道大義)라는 서첩을 지었고, 속초 수복탑 글씨도 썼다. 실제 이 대통령의 시판에는 전형윤의 서체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청간정 시판 관련 내용은 이 대통령 회고록에도 나오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현재 청간정 정자에 이승만 대통령 시판이 아예 걸려 있지 않다. 청간정 입구에 위치한 자료전시관 유리관에 빈 공간이 눈에 띈다. 이 대통령의 시판을 전시하려고 비워둔 것이다. 그런데 시판을 가져간 것으로 추정되는 분이 돌려주지 않고 있어 저 상태로 있다고 한다. 시판은 1980년대 청간정 중수시기 또는 1996년 고성산불로 청간정 난간이 일부 탔을 때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08. 청간정을 노래한 시
'관동별곡' 중에서/ 정철(鄭澈)
고성일랑 저기 두고 삼일포를 찾아가니
붉은 글씨 완연한데 사선(四仙)은 어딜 갔나
여기 사흘 머문 후에 어디 가서 또 묵었나
선유담 영랑호 거기에나 가 있는가
청간정 만경대 몇 곳에 앉았던가
淸磵亭(청간정) / 양사언(楊士彦)
九霄笙鶴下珠樓(구소생학하주루)
萬里空明灝氣收(만리공명호기수)
靑海水從銀漢落(청해수종은한락)
白雲天入玉山浮(백운천입옥산부)
長春桃李皆瓊蘂(장춘도리개경예)
千歲喬松盡黑頭(천세교송진흑두).
滿酌紫霞留一醉(만작자하유일취)
世間無地起閑愁(세간무지기한수)
하늘 높은 곳에서 신선이 아름다운 누각에 내려와
만리에 걸친 빈 하늘의 호방한 기운 거두어 모았네.
푸른 바다 은하수 따라 떨어져 물이 되니
흰구름 타고 신선이 옥 같은 산 위를 떠도네.
사시사철 복사꽃 오얏꽃은 모두 옥 같은 잎새
천년 묵은 소나무는 검은 머리 다 했네.
자하주 가득 부어 취하도록 마셔
세상 한가로운 시름 일어날 곳 없다네.
淸磵亭晝睡(청간정주수) / 허균(許筠)
楓岳曇無竭(풍악담무갈)
金門老歲星(금문노세성)
相逢雖恨晩(상봉수한만)
交契自忘形(교계자망형)
暫別緣塵累(잠별연진루)
幽期屬暮齡(유기속모령)
高亭殘午夢(고정잔오몽)
天外萬峯靑(천외만봉청)
청간정에서 낮잠을 자다
금강산 담무갈 보살이 그대라면
대궐의 뛰어난 신하는 나 아니겠나
그대와의 만남이 한참 늦었으나
서로의 처지 잊고 절로 친해졌네.
세상에 매인 몸이니 잠깐 떨어졌다가
늙은 뒤에 호젓하게 다시 만나세.
높다란 정자에서 낮잠을 깨고 보니
일만 봉우리 하늘 끝에 푸르구나.
杆城郡 驛院 淸澗驛(간성군 역원 청간역) / 김극기(金克己)
雲端落日欹玉幢(운서락일의옥당)
海上驚濤倒銀玉(해상경도도은옥)
閑搔蓬鬢倚朱闌(한소봉빈의주란)
白鳥去邊千里目(백조거변천리목)
간성군 역원 청간역
구름 끝으로 해는 떨어지고 수레를 멈췄는데
바다에는 놀란 파도가 은색 물결을 뒤집네.
한가로이 흰 귀밑털 긁으며 붉은 난간을 의지해 서니
백조 날아가는 저 가(邊)에 천 리나 바라보이네.
☞김극기(金克己, 1150∼1204) : 고려 때의 문신.
淸澗亭(청간정)/ 택당 이식 (澤堂 李植)
天敎滄海無潮汐(천교창해무조석)
亭似方舟在渚涯(정사방주재저애)
紅旭欲昇先射牖(홍욱욕승선사유)
碧波纔動已吹衣(벽파재동이취의)
童男樓艓遭風引(동남루접조풍인)
王母蟠桃着子遲(왕모반도착자지)
怊悵仙蹤不可接(초창선종불가접)
倚闌空望白鷗飛(의란공망백구비)
청간정
하늘의 지시로 바다엔 밀물 썰물 없고
방주 같은 정자 하나 물가에 서 있네
붉은 해 솟으려고 광선 먼저 창문을 쏘고
푸른 물결 일렁이자 옷자락 벌써 나부끼네
남동녀 실은 배 순풍에 간다 해도
동왕모의 복숭아는 여는 시기 까마득하여라
신선 자취 접하지 못한 아쉬움 속에
난간에 기대서 나는 백구만 바라보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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